冊에 묻히다

김영도 선배님의 <형제산> 산에서 들려오는 소리 중에서

한닙 2009. 3. 14. 23:23


# 1.


서울 농대 구경모형이 김영도선배님 출판기념회에 다녀왔다고 했는데,
경모형이 받아 온 책이 몇 다리 건너 내 손에 들어왔다.
(내심 행복해졌다. 돈 주고 사서 보려 했는데..^^)

- 경모형 책 잘 받았어요. 형이 지원해주는 수혜자에 나두 끼는 거네요.

고맙다는 전화를 냉큼 돌렸다.

그리고도 책상에 일주일 쯤 표지도 펼치지 못하고 올려두었다가..
어느 저녁 , 한 잔의 차와 함께 넘기기 시작했다.

아, 이 책은 한꺼번에 다 읽으면 안될 것 같았다.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읽어야 제 맛이 날 것 같았다.
우리나라 산악계의 가장 원로라고 해야 할 김영도 선배님의 산생활이 그대로 녹아있는 책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김영도 선배님을 뵙고 제대로 인사 드린 적이 없다;;)

 


# 2.


김영도 선배님의 <산에서 들려오는 소리>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형제산 편이다.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라

어렵사리 타이핑까지 쳐서 보관,

 

# 3.

 

<형제산> 편의 본문 일부는 다음과 같다.



6.25 때 안강 전투는 유명하다.
기계 비학산에 인민군 대부대가 집결하고 안강,포항 일대에 우리 수도사단 사이에 연일 격전이 벌어졌다.
그 무렵 전선은 동해안 포항에서 내륙으로 안강, 영천, 대구를 거쳐 남해안의 마산까지 그 좁은 땅덩어리만 남았다.

일컬어 '부산 페리미터'라고 당시 외신이 그럴듯하게 보도했는데. 실은 대한민국이 이렇게 줄어들었던 것이다.

만일 대구의 팔공산과 경주의 형제산이 무너지면 부산까지 밀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형제산은 아군으로서 최후방어선이었다.
그 때 우리 학도병 중대는 17연대의 마지막 카드였고 그 존폐의 운명까지 도맡았던 셈이다.

 


.. 중략 ..


나는 에베레스트에 갔던 사람으로서 그 세계 최고봉을 평생 잊지 못하나 형제산은 더욱 잊을 수 없다.

에베레스트는 원정대장으로 대원 18명의 선두에 섰었고, 형제산에서는 분대장으로 11명 분대원의 앞을 갔다.

전자는 산악인으로서 알피니즘의 싸움이었으나, 후자는 학도병으로 이데올로기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에베레스트에서 나는 석 달 동안 대원 한사람도 희생하지 않았는데, 형제산에서는 하루사이에 분대원 9명을 잃었다.

.. 중략 ..


형제산은 6.25가 아니었다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경상북도 바다 가까운 곳 기계 안강과 더불어 나의 20대의 청춘이 약동했던 무대다.

나는 6.25가 터지자 서울의 그 많은 대학생 젊은이들이 한결같이 도망쳤던 사실을 잊지 못한다.

그들은 비겁했다기 보다 나약하고 무기력했으며 무엇보다도 젊은이 답지 않았다고 본다. 

나는 굳이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내세울 생각이 없다.

그러기에는 우리사회가 너무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배움은 즐거움이고 장식이며 능력이다' 라고 했지만 나는 지식은 결코 장식물이 아니라고 본다.

인간의 존재이유와 조건이 바로 지식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스의 소피스트가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했다는데 인간은 무엇을 척도로 삼을 것인가 이따금 자문자답 한다.

그러나 지식이 능력인 것은 분명하며. 그때 지식은 행위를 전제하고 예상한다.

다시 말해서 알며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지식이 아니다.

 

나에게는 두 산이 있다.

에베레스트와 형제산인데, 앞의 것은 인생의 상징이고 뒤의 것은 지우려야 지울 수 없는 원한의 대상이다.

이 산들은 나의 80여 평생에 양극을 이루고 있다. 높이와 뜻에서 그렇다.

한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쫓기고 쫓기던 1950년 한여름,

내노라하는 집안의 자녀들이 전란을 피해 일본이나 미국으로 도망갔다가 세월이 조용해지자 돌아왔다.

그런 사람들을 적지 않게 나는 안다.

그리고 그들이 훗날 우리 사회의 지성을 대표하며 얼굴을 쳐든 것도 많이 보았다.

형제산을 공격하던 당일, 전날의 비로 강물이 불어 우리는 거기를 건너느라 애를 먹었다. 

그리고 현지임관하자 바로 온,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소대장 뒤를 따라 공격대기선을 넘었다.

그러자 산마루에서 적군의 총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산에는 한그루의 나무도 없고 몸을 숨길데도 없었다.

산마루가 그대로 올려다 보이니 적도 우리를 그대로 내려다 보았으리라.

순간 눈앞에서 소대장이 쓰러지고 뒤따르던 친구들도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것은 생지옥이었다. 시간조차 멎었다.

그런데 그 수라장은 오늘날까지 기록된 일이 없고 입으로 전해지지도 않았다.

그때 거기 있었던 사람들은 거의 죽었으니까.

나는 앞에서옛날 기어오른 산허리를 더듬었다.

오랜 세월 풍설로 토사가 흘러내려 주위가 온통 돌밭이었다. 깊이 골짜기가 패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지난날 격전지의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여기저기 용담초와 철을 모르는 진달래가 가련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맑게 갠 가을하늘 아래 형제산은 평화스럽기만 했다.

우리는 산마루를 보고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레마르크 전쟁소설 끝장이 머리를 스쳤다.

제 1차 세계 대전 때 한 반에서 같이 지원나갔던 독일 학도병들이 하나하나 죽어갔는데

사령부 보고는 '서부전선 이상없음, 보고할 것 없음' 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