冊에 묻히다

신화처럼 숨을 쉰다는 고래 이야기

한닙 2009. 1. 9. 23:24


1.

그 날은 봄소풍이었다.

종로에 있는 단성사였던가 피카디리였던가
(두 극장은 마주하고 있어서.. 늘상 헷갈린다.)
영화 고래사냥이 개봉하는 날이었고,
소풍을 마치고 잽싸게 극장으로 튀어서
길게 늘어선 매표줄 끝에 매달려 간신히 영화를 봤던 기억이 아릿하다.

춘자의 고향인 동해 바다 어딘가에 있다는 섬으로 떠나는 병태와 민우의 이야기였다.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그게 벌써 25년 쯤 전으로 기억되니까 
신화처럼 숨을 쉰다는 고래를 몇 번쯤 더 만났을 나이가 되었다.


2.

- 할아버지, 고래가 꽃을 피운다는 게 무슨 뜻이예요?

- 그건 말이다 ... ... 고래가 작살을 맞으면 쉽게 죽지 않고 도망치면서 물 속에 숨었다 숨쉬러 나왔다 하거든.
그러면서 두 시간, 세 시간씩 고래배를 끌고 다닌다.
그러다가 고래가 지치면 배를 고래 가까이 붙이고 정확하게 급소에 작살을 꽂는다.
급소를 맞은 고래는 죽기 전에 마지막 숨을 내뿜는데, 그 숨에는 피가 뿜어져 나온다.
핏빛 물 뿜기가 공중으로 솟구쳤다가 온 바다 가득 퍼진다. 그걸 꽃핀다 한다.

할아버지는 말끝에 
- 누가 들으면 죄 많다 하겠다. 우리는 고래 말고는 닭 한마리도 못 잡는데
라고 덧붙였다.


                                                             - 꽃 피는 고래 중에서, 김형경 -



3.

할아버지, 고래는 어떻게 숨을 쉬어요?

고래마다 다르지.
돌고래 숨결은 부채살처럼 퍼지는 모양이고, 참고래나 대왕고래는 한 줄기로 높이 뿜어 올리지.
떨어질 때는 꼭 굵은 눈송이들이 흩어지는 것 같다.
한 번 숨 쉬러 올라오면 수면에 오 분이나 십 분쯤 머문다.
그림책에서 자주 보는 것처럼 두 갈래로 갈라져  솟는 물뿜기는 수염고래 것이다.

할아버지는 고래가 숨쉬는 모양을 자세히 설명해주었지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고래가 어떻게 신화처럼 숨을 쉬는가 하는 거였다.


                                                 - 꽃 피는 고래 중에서, 김형경 -



4.

새해 처음으로 읽은 책이 <김형경의 꽃피는 고래>였다.
작년 여름나기를 하며 사서 책장에 꽂아두었던 책인데.. 손이 가길래 펼치고 앉아 몇 시간 만에 다 읽었다.











책을 읽다보면,
그것도 궁합이 있구나 싶다.

재미도 있고 좋은 책인데 유난히 진도가 안 나가는 책이있고,
이렇게 몇 시간만에 다 읽어버릴 만큼 푹 빠져버리는 책도 있다.
남들은 재미나다 어쩌다 하는데, 슬쩍 들여다보고 슬며시 책값만 아까워지는 책도 있다.

이럴 때는 아무 미련없이 중고로 되팔아 버린다.
안보는 책은 되도록 책의 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가 책에 대한 내 생각이다.



5.

갑자기 오래 전 보았던 고래사냥이란 영화가 슬며시 떠올랐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니은이와 나무도 그 때의 내 나이쯤 되는 것 같다.


니은이가 
몸을 가득 채우는 공기나 햇살처럼 고래가 어떻게 숨을 쉬는지 그냥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나와 친구들도
영화가 끝나고 종로 거리로 나오며
우리들 자신이 고래를 찾으러 떠나는 듯 들떴던 시간이 오래된 파노라마 사진처럼 떠올랐고,
어렴풋이 삶이 이런 거다라는 걸 그냥 몸으로 느꼈던 것 같다. 




6.

2009년은


먼저,
흐린 날, 오후에는 바람이 분대요. 따뜻한 국물 마시고 든든하게 하루 시작하세요.
와 같은 문자 메시지를 경매로라도 살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문득 걸음이 내키는 날..
처용포로 떠나 
처용과 황옥의 놀이도 해 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징징거리지 않기
변명하지 않기
핑계대지 않기
원망하지 않기
를 기억해 두어얄 것이다.


김형경의 문장은 
생각보다 힘이 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