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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에 묻히다

동무와 연인 - 김영민


동무와 연인


- 말, 혹은 살로 맺은 동행의 풍경



올 봄이던가?
어딘가에서 리뷰를 읽고 산 책인데,
여름을 보내며 김영민이 쓴 이 책의 책장을 넘기며 더위와 씨름을 해댔던 것 같다.


그럼에도 새김이 덜 되었던 것 같다.
 


1.


동무와 연인이라는 이 책을 읽으며,
김영민이라는 사람.. 참 대단한 여성주의자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뭐, 전에도 대단해보이는 여성주의 관점의 남자들을 여럿 만난 적이 있지만
실체를 알게 되면 번번 실망이었다.
(게 중에는 여자들을 꼬시기 위한 지성의 도구로 여성주의를 이용하는 남자분도 있었다.ㅠㅠ)


누군가는 
우리 시대의 실천적 철학자로 
김상봉과 김영민을 꼽았고..


대학의 교직에서 스피노자적 철학자의 길을 선택했다니.. 
이론만 있는 사람은 아니구나 싶었다.


2.


동무와 연인은 한겨레 신문에 연재된 신문 칼럼을 모은 것이라는데..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꽤.. 솔깃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책에 실린 21편의 이야기는 
예술이나 문학, 철학 등의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어 온 내용이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무수하게 반복되고 있는 갑남을녀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3.


크레이스너와 폴록


- 연인 간의 사랑이 창조적 생산성의 채널 속으로 피드백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보다도 인정이다

나는 근기는 물론이거니와 재기마저도 갉아먹는 사랑의 열정을 수없이 목격했다.
인정 투쟁을 악용하면서 허영과 탐욕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랑은 또 얼마나 흔한가?
그러나 생산적 상호 인정은 연인간의 사랑이 창조적 열정과 호혜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토대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욕망만도, 애착만도, 제도만도 아닌 사랑의 관계를 이루기 위한초석이며,
연인이 동무와 겹치면서 이드거니 함께 걷도록 돕는 길이기도 하다.
하버마스-호네트 식으로 말하자면,인정망각은 연인을 물화시키는 짓이며,
사랑이라는 무시무시한 맹목의 동력을 상호 인정의 호혜적 의사소통의 관계로 승화시키는 길만이
연정의 생산성을 보장하는 방법이다.


크레이너스와 폴록의 애정이 둘 사이의 예술적 창의성이나
생산성과 호혜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던 중요한 조건은 상호인정이라는 제3의 매개일 것이다.

마치 감성과 오성을 매개하는 상상력처럼, 인정은 사랑과 생산성을 매개한다.
그리고 인정과 실천적 공감이 없는 애정이 짧은 애착으로 빠지거나 변질되고 마는 것을 우리는 쓸쓸하게 목도한다.

 

4.

피카소의 천재적 에고이즘


<나의 할아버지 피카소 - 마리나 피카소>에서


" 그가 여자들을 좋아한 것은 그들이 그에게 불러일으키는 동물적 성충동 때문이었다.
여자들은 자신들의 신비를 토해내야만 했다.
신선한 육체를 좋아하는 그는 그들을 서둘러 죽였고, 강간했으며, 영양분으로 섭취했다.
피와 정액으로 범벅이 된 그들을 자신의 화폭에 열정적으로 되살렸으며,
그들에게 자신의 폭력을 받아들이기를 강요했고,
그들이 불러일으키는 성적인 힘이 무뎌졌을 때는 가차없이 그들에게 죽음을 선고했다.
그가 섹스와 그림에서 끌어내는 관능은 본질이 동일했다."


에바구엘은 31세로 요절했고, 올가 코홀로바는 그의 애정을 잃은 뒤 정신이상을 일으켰으면 반신불수로 삶을 끝낸다. 마리 테레즈도 그에게 버림받은 뒤 그의 죽음과 함께 목을 맨다. 도라 마르도 그와의 이별을 삭이지 못한 채 정신병원을 들락거렸고, 자클린 로크도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마리나 피카소는 오빠 파블리토의 자살,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이자 피카소의 장남인 파울로의 자살을 모두 할아버지 피카소의 탓으로 돌린다. 피카소를 정점으로 그녀의 가족사를 뒤덮은 먹구름 속으로부터 힘겹게 빠져나와 사회봉사 활동을 벌이고 있는 그녀는 절규한다.


"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절망에 빠트릴 권리가 위대한 예술가들에게는 있는가?  그들의 작품이 제 아무리 찬란할 지 언정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킬 만한 가치가 있는가?  나의 가족은 저 천재가 쳐 놓은 덫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 하나하나를 완성해 가는데 타인의 피를 필요로 했다."


5.


매창과 유희경


- 사랑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가령 이별이나 둘 사이를 가르는 거리의 문제이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 정한은 네트워크 시대에 우리들이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중세적 거림감인 아득함에 닿아 있다.
 

노스텔지어(향수)의 문제를 인문지리적, 계보학적, 혹은 매체론적으로 분석할 수 있듯이, 상사병의 기원이나 매커니즘도 조금 다르게 헤아리고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향수병이나 상사병은 지리적 거리가 인간관계를 결정적으로 규정했던 과거의 유산으로 이제는 급속히 소멸하고 있다. 전방위적인 원격통신이 현실화 된 지구촌에서 매체적 변덕이 기승을 부려 지역이나 사람 중심의 애착이 발을 붙일 현실적 기반을 잃어가고 있다. 요컨대 노스텔지어가 결국 마음자리를 통해서 해결-치료되는게 아니었듯이, 연인 사이의 원격감응방식 - 마치 주술처럼 - 인 상사병도 각자의 마음자리를 톺고 까부른다고 해서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룻밤 봄바람에 비가 오더니
버들이랑 매화랑 봄을 다투네
이 좋은 시절에 차마 못할 건
잔 잡고 정든 임과 이별하는 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피어나는 거리와 틈과 그리움과 사랑..
그리고 틈과 거리와 어긋남의 계기를 기계적으로 삭제시키는 매카니즘적인 사회에서
작가는 사랑이 가지고 있는 심리주의를 마음이 문제이기보다 이별과 거리의 문제라고 보는게 낫다고 이야기한다.



6.

동무와 연인은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루 살로메와 니체, 윤심덕과 김우진 같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만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애인들의 동성애적 관계, 이덕무와 박제가처럼 같은 길을 걷는 동무와도 같은 관계, 프로이트와 융의 화해하기 어려웠던 스승과 제자의 관계, 쇼펜하우어와 그의 어머니 요한나의 관계 , 에밀 졸라와 드레퓌스의 관계, 석가의 말에 미소로 답했다는 가섭의 관계 등이 그려지고 있다.


곧, 우리가 살아가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맺어지는 관계의 텍스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