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여름, 페터 하벨러와 같이 카라코람에 있는 표고 8,068미터의 히든피크에 올라갔을 때, 우리는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페터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알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냐고 물으려 할 때마다 얼굴을 보지 않고도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 통했다.
죽음의 지대 중에서 , 메쓰너
나에게 감동 깊게 읽은 山書 중 하나를 꼽으라 하면,
메쓰너가 쓴 <죽음의 지대>이다.
나와 함께 산악부 신입부원 시절을 보낸 동기중 한 친구는 메쓰너의 <검은 고독 흰 고독>을 더 좋아했다.
<검은 고독 흰 고독>은 내가 산에 다니기 시작한 그 무렵 산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책이기도 했는데
친구는 책의 내용을 좋아한 것인지 <검은 고독 흰 고독>이라는 다소 낭만적일 지 모르는 책 제목을 좋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친구 덕에 책장을 넘겨보았으나 그렇게 깊이 와 닿지를 못했다.
어쩌면, 이제 산에 걸음마하기 시작한 신입부원인 나에게 8,000미터의 세계를 말하는 메쓰너의 이야기는 선뜻 받아들여지지 못했는 지도 모른다.
그 무렵의 어느 날,
나는 밤색의 딱딱한 책장으로 덮여 있던 모 선배가 기증했다는 서명이 들어있는 한 권의 책을 찾아냈다.
역시 메쓰너가 쓴 죽음의 지대라는 책이었는데.. 그 책을 빌려다 놓고 한 달을 넘게 읽어댔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많은 부분들을 메모해 놓고 읽고 또 읽곤 했는데,
그 후, 산에 다니며..
가끔은 그 메모의 내용들을 나 역시,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간혹 생겼다.
많은 세월이 지났고..
메쓰너의 <죽음의 지대>가 간간 생각나.. 서점을 뒤져보았지만,
늘 절판이라고 나오곤 했는데
모 온라인 서점에서 죽음의 지대를 판매중이란 소식을 받았다.
오호, 이런 소중한 정보가..
조금 전.. 어둠이 내린 저녘,
메쓰너의 죽음의 지대가 배달되어 왔다.
나는 지금 만사를 제끼고 죽음의 지대를 뒤적이고 있다.
(읽는 게 아니라 뒤적인다는 표현이 딱 맞을 것 같다.)
예전의 밤색표지의 딱딱한 양장본 책은 아니지만, 흐릿한 기억기억들이 그대로 살아나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누구에게든 자신만의 유토피아가 있을 것이다.
그 기준점 역시도 다를 것이다.
8,000미터 등반지 중 가장 쉬운 곳이 초오유라고 말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다는 초오유이지만,
그 곳은 나에게 처음 오르는 8,000 미터이고, 소중한 등반일 것입니다.
내가 오를 수 있는 능력으로 최선을 다하는 등반일 것입니다.
그것으로 저는 행복합니다.
그 때, 그 이야기를 들으며..
사실 내색을 하지 못했지만, 나는 많이 부끄러웠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
자신만의 소중한 의미를 이루어가는 그 행위 자체가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메쓰너의 <죽음의 지대>라는 책장을 뒤적이며 참으로 행복한 밤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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