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he passage

오렌지 맛 오렌지 / 성석제



비읍은 편집부에 새로 들어온 신참치고는 아는 게 많았다.

그런데 그가 아는 건 조금씩 틀렸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보다는 사전이나 그 사전을 끼고 십 년 이상 먹고 살아온 우리를 의심하는 쪽을 택해서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실수를 할 때마다 그의 별명을 그 실수를 상징하는 말로 바꾸어 줌으로써 복수를 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비읍 씨, 일 안하고 아침부터 거기서 뭐 해요?"

 "차장님, 저 문방구 앞에 우산 들고 있는 아가씨 다리 참 죽여 줍니다. 가히 뇌살적이군요."

 "비읍 씨, 이거 비읍 씨가 교정 본 거죠? 그렇게 뇌살 좋아하면 쇄도(殺到)를 살도(殺到)라고 하지 왜 그냥 놔 뒀어요?"

   "하하하, 리을 선배님. 선배님 다리 역시 뇌살적이지만 저 아가씨는 춘추가 선배님 연치(年齒)에 비해 방년 이십 세는 적어 보이고 따라서 또 뭐냐, 원스 어폰 어 타임 투기는 칠거지악(七去之惡)으로……."

"지금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얏!"

 그 다음부터 한동안 그의 별명은 살도가 되었다. 한동안이란 그로부터 한 달 뒤 '흥미율율' 사건이 터지기까지.


 여름철이 되고 고등 학교 야구 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비읍은 제가 나온 학교도 아니면서 고향 고등학교라는 이유로 열렬히 응원을 하고 있었다.

인색하기 짝이 없는 그로서는 표 사서 야구장에 갈 일은 없었고 편집부 안에서 신문을 보면서 입으로 하는 응원이 전부였지만.

 "우와아! 차장님. 어제 우리의 경상고 피처가 연타석 홈런을 깠습니다. 캐처는 6타석 4타수 4안타. 유격수는 도루가 네 개. 결승 진출은 맡아 놨구만."

 "이거 봐요. 비읍 씨. 그 학교가 자네 학교야? 그 동네는 그 학교 근처만 갔다오면 다 한 학교 출신이 되나?"

 "헤헤. 차장님. 모르시는 말씀. 경상시야 한국의 영원한 구도(舊都) 아니겠습니까. 야구하면 경상, 경상 하면 야구지요."

 듣고 있던 리을이 나섰다.

 "그럼 동네 이름을 야구시로 짓지 그랬어요. 아냐, 비읍 씨 고향을 기리는 의미에서 앞으로 우리가 비읍 씨를 야구 씨라고 불러 줄게."


어지간하면 질릴 법도 하련만 비읍은 천하 태평이었다.

"이거 사방에 적군의 노래뿐이니 완전히 사면초가(四面楚歌)일세.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비읍 씨. 하나 물어 볼 게 있는데 말예요. 사면초가에서 왜 적군이 초가를 불러요?"

"역시 리을 선배님은 여자라서 역사는 잘 모르시누만. 그게 말임다. 항우가 적벽 대전에서 유방에게 포위가 됐는데 말임다."

"적벽이 아니라 해하(垓下)겠지."

"차장님, 적벽이나 해하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말임다. 한나라 군사가 초나라를 포위하고 오래 있다가 보니까네 초나라 유행가를 다 배웠다는 검다. 항우가 듣다가 그 노래가 너무 슬퍼서 아, 졌다 하고 자살을 했단 말임다."

 "한나라 군사가 초나라 노래를 불러 줬다구?"

 "그쵸. 그게 장량의 작전이었다 이 말임다. 아, 근데 차장님은 한참 이야기가 흥미율율할 만하면 꼭 초를 치십니까, 그래?"

 "흥미, 뭐?"

 "또 초 치셔."

 "비읍 씨. 나도 못 들었어요. 흥미 뭐라고 했어요?"

 "아, 율율!"

 "율율?"

 "율! 율! 왜욧!"


  흥미진진(興味津津)을 흥미율율(興味律律)로 우겨 바라던 '야구' 말고 '율율'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가 한동안 자중(自重)을 하는 듯하더니 문득 결혼을 했다.

 편집부에서 집들이 차 그의 집을 가면서 오렌지 주스를 샀다.

 "이봐. 거 뭐 마실 것 좀 내오지."

 결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비읍은 십 년 넘게 마누라를 호령하며 살아온 사람처럼 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체면이 깎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안타깝게도 그의 부인 역시 십 년 넘게 살림을 해 와 살림에 이골이 난 여인네 같은 몸빼 차림으로 나타나 홍분(紅粉)의 아리따운 새댁을 보러 갔던 사람들의 기대를 꺾었다.

그리고 그 부인이 내온 음료수가 비읍에게 새로운 별명을 선사했다.

 "내가 산 건 백 퍼센트 천연 무가당 오렌지 주스였단 말야. 그런데 그게 언제 오렌지 맛 음료로 바뀌었는지 모르겠어. 정말 환상적인 부부야."

 일동은 그의 집을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그를 당분간 '오렌지 맛'이라고 부르기로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백 퍼센트 오렌지 주스를 혼자 마시고 있을 그의 부인은 '오렌지 부인'으로 부르기로 했고...


                                                                                    <재미나는 인생> (1997) 성석제


이 글을 읽으면

처음에 웃음이 터진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읽다보면 종내  쓴 웃음이 난다.


나는 솔직하지 못한 사람을 싫어한다.

대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가 자기의 약은 체 하는 모습을 알지 못하리라 계산하고 행동한다.


이미 상대가  자신의 교활함 + 권모술수까지 내다보고

때로는 따끔하게 한마디 훈수도 하고

때로는 알고도 모르는 척 덮어 준다는 사실을

간과한 체 말이다.


살아 가면서.

이런 사람을 한두 번쯤 만나게 된다

한 번 만나고 말 사람이야 그렇게 사는가 보다고 넘겨 버리지만

지속적 인연을 가져야 할 사람이 ㅂ씨라면

그를 대할 때마다 씁쓸하기 그지없다.


 

'The passage'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흔들리지 마 / 최승자  (0) 2006.04.09
먼 곳에의 그리움 / 전혜린  (0) 2006.03.26
사랑. 1 / 김남주  (0) 2006.03.16
春夜喜雨(춘야희우)  (0) 2006.03.07
다른 가능성이 없었다.  (0) 2006.02.20
梧桐에 듯는 빗발 / 김상용  (0) 2006.01.13
판소리 춘향전 中에서 사랑가  (0) 2006.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