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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ssage

낯선 시간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



낯선 시간을 꿈꾸는 순간 ...  

엘리엇의 황무지에 등장하는 쿠마 여신을 떠올리게 된다.

아폴로 신으로부터 손 안에 든 먼지만큼 오래 살 수 있는 장수의 축복을 받았지만,

영원한 젊음도 함께 달라는 요청을 안 했기 때문에 늙고 메말라 조롱에 갇힌 쿠마 여신,

"무녀야, 넌 무얼 원하니?" 아이들이 묻자...

" 난 죽고 싶어!" 쿠마의 여신은 대답했다.

 

죽음을 통해 우리는 진실을 발견하게 되고

낯선 시간의 상징은 능소화를 통해 돌아간다.

 

- 이선옥의 순치되지 않은 생명력 중에서-




 

 

지난 주 여의도에 나가 한참을 걸었다.

강변을 걸으며 참으로 오랫만에 자유를 맛보았다.

서늘한 바람의 노래가 들려오던 강변에는

콘크리트 담장을 따라 피어오른 능소화꽃이 시들고 있었다.

 

 

느네 둘, 둘 다 의사 될 거라면서

잘났어.난 훌륭하고 돈 잘버는 의사하고 결혼할 건데.

약오르지롱. 메롱.

 

현금이는 분홍색 혀를 날름 드러내보이곤 나풀나풀 멀어져갔다.

 

그녀의 분홍색 혀가

맨몸 곳곳에 도장을 찍고 스쳐 간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스럽고도 감미로운 떨림이었다.

 

현금의 집은 이층집이었다.

여름이면 이층 베란다를 받치고 있는 기둥을 타고

능소화가 극성맞게 기어 올라가 난간을

온통 노을 빛깔의 꽃으로 뒤덮었다.

 

그 꽃은 지나치게 대담하게, 눈부시게 요염하여

쨍쨍한 여름날에 그 집 앞을 지날 때는 괜히 슬퍼지려고 했다.

 

어렴풋한 허무의 예감이었다.  

           .

           .

           .

 

시도 때도 없이 그의 꿈의 능소화가 만발하는 것과는 달리

그 이듬해부터 현금이네 집에는 능소화가 피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 집 문패가 유씨 성이 아닌 성으로 바뀐 것을 알았다.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 中에서  

 

 

 

지난 여름내내

내 꿈 속에서도 불타오르는 능소화 줄기가 자주 나타났다.

능소화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분홍색 혓바닥을 내밀고 메롱하던

현금이의 입술이 또렷이 보였다.

 

나는 지금 현금이란 여자의 나이만큼 자랐다.

 

죽음의 소외와 맞물려

탄생의 불모성에 대한 이야기가 겹쳐지며

오래된 농담은

빛바랜 옛 추억이 되어 여름을 보내고 있다.

 

죽음과 탄생이 갖는 양면성은

현대 사회가 갖는 자본의 불모성과 함께 연결되고

속물적 근성의 현대인들을 나열시켜 보여준다.

 

몸은 현금이만큼이나 자랐는데도

정신은 저 밑바닥에서 꼼지락거리며 올라오질 못하고 있다.

꼬이고 비틀리고 뒤엉켜진 현실을 바로 보기에

나는 너무 지쳤는지도 모른다.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주변 사람들의 행동이 내게 버거워질 때면    

왠지 현금이의 메롱하던 그 분홍빛 혀가 들여다 보인다. 




다시 능소화의 계절이 돌아올 때 쯤이면

꼬이고 비틀리고 뒤엉킨 삶들이 제 자리를 찾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