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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에 묻히다

1973년의 핀볼


# 1.

안녕, 하고 나는 말했다.
......아니, 말하지 않았는 지도 모른다.


# 2.

그녀는 가까스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나에게 미소 지었다.
그리운 미소였다.
나도 미소 지었다.

무척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나는 생각하는 척하며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3년 쯤 된 것 같다.
눈 깜짝할 사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잠시 침묵했다.
찻집 같으면 커피를 마시거나 레이스 커튼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을 게다.

당신에 대해서 자주 생각을 했지, 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무척이나 비참한 기분이 되었다.

잠 못 이루는 밤에요?
그래, 잠 못 이루는 밤에, 하고 나는 되풀이했다.
그녀는 줄곧 미소를 짓고 있었다.
춥지 않으세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춥지, 굉장히 추워.
너무 오래 있지 않는 게 좋아요.당신에게는 너무나 추운 곳이예요.


# 3.

왜 왔어요?
당신이 불렀기 때문이지.
불러요?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수줍은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그럴 지도 몰라요. 불렀을 지도 몰라요.
굉장히 찾았다구.
고마워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 4.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건 아주 오래 전에 죽어버린 시간에 단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얼마 안되는 그 따스한 추억은 낡은 빛처럼 내 마음 속을 지금도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죽음이 나를 사로잡아서 다시금 무의 도가니에 던져 넣을 때까지의 짧은 한때를 나는 그 빛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

이제 그만 가보는 게 좋겠어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분명히 냉기는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담배를 밟아 껐다.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요.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잘 지내세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고마워. 안녕, 잘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 5.

다시 창고를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가 전등 스위치를 끄고 문을 닫을 때까지 오랫동안 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하루키의 <1973년의 핀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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